이러한 탈자연화의 글쓰기는 단순히 언어와 유희하려는 욕망에서 행해지거나, 몇몇 비평가들이 추측하듯(연극이나 정치가 언제나 분명하게 구분되기라도 하듯) ‘진짜’ 정치의 자리에 연극적인 익살극을 지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.
그것은 살기 위한 욕망,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다. 가족, 친구, 그리고 다른 종류의 확장된 구성원과 함께 살려면 아저씨께 이 세상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? 규범에 가까이 가지 못한 사람은 생중사의 형벌을 선고받게 하는 이런 이상적 형태론의 규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?
주디스 버틀러가 쓰고 조현준이 옮긴 <젠더 트러블: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> 의 서문 중에서.